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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과학

과학 #4 - 길버트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과학 - 우리가 알아야할 모든 것 책정리 네번째입니다. 


갈릴레오를 최초의 과학자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전에는 논리적인 해석과 모형을 통한 가설의 이해가 주된 흐름이었다면 16세기와 17세기 사이 이 시기에는 가설을 실험과 관찰을 통해 비교해 보는 과학적 방법이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와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 제시된다. 


길버트 (1544.5 ~ )

 윌리엄 길버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지역 유지집안에서 태어나 자기의 성질에 대한 철저한 탐구로 물리학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돈이 많았기에 엄청난 자금을 바탕으로 과학 연구를 했다.

당시 전기와 자기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탐구 이후에 무시된 채로 남아 있었다. 

18년동안의 연구 끝에 1600년 <자석, 자성체, 거대한 자석 지구에 관하여> 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영국의 물리과학 분야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중요한 저작이었다.

천연자석을 이용하여 금속조각에 자성을 입히는 기법을 발명했다. 자석의 인력과 척력 법칙을 발견했고 막대자석의 양끝에 북극과 남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길버트 이후 1820년대 마이클 패러데이의 작업이 있기까지 2세기 동안 자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이 거의 없었다.

지구에서의 별들의 거리는 서로 다르고 여러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는 태양과 같은 천체들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기와 자기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기전물체'electric' 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특히 이책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발견을 손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실례를 들어가면 자신의 과학적 방법을 투명하게 정리했다. 

이 책에 고무되어 갈릴레오는 자기에 대한 탐구를 직접 실행에 옮겼고 길버트를 실험적 과학 방법의 창시자라고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1564.2 ~ 1642.1)

Justus Sustermans의 갈릴레이 초상화


피사에서 태어났다. 갈릴레오 보냐우티라는 15세기의 갈릴레오 조상이 유명했기에 그를 기리고자 성을 '갈릴레이'로 바꾸기로 함에 따라 이중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집안은 괜찮은 가문이었지만 맏이로서 나중에 많은 부담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나이 17세에 아버지의 바람대로 피사 대학교 의과대학에 등록했다. 그 당시 그는 논쟁을 즐기는 성향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게 '시끄러운 논쟁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1583년 궁전을 드나들던 아버지를 통해 궁중 수학자 오스틸리오 리치를 알게 되고 수학에 빠져들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학공부를 계속하여 수학과 자연철학의 개인교습을 했다. 

1602년 진자의 진동주기가 진자의 무게나 진자의 진동폭과는 관계가 없고 진자의 길이에만 비례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갈릴레오가 피사 대학교 수학교수로 재직할 때 벌어졌던 일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서로 다른 물체를 떨어뜨려 동시에 땅에 땋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는 증거없는 이야기다. 

1612년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어느 교수가 그 유명한 실험을 해보자면서 무게가 다른 물체들은 거의 같은 시간에 땅에 떨어진다는 갈릴레오의 주장을 묵살하려고 했다. 실제 실험에서 정확하게 떨어지지 않자 갈릴레오의 주장이 틀렸다고 했지만 갈릴레오는 어이없어 했다.

1592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파도바에 교수직으로 취임했고 18년동안 여기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의 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했다. 

1590년대 중반 컴퍼스를 발명하여 재정적 수입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포의 고각을 계산하는 장비였지만 그후 수십년에 걸쳐 완벽한 계산 도구로 발전되었다. 

1604년 40세가 된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실질적인 이득을 안겨줌으로써 자연철학자, 수학자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 유명한 진자와 경사면을 구르는 공에 대한 실험들이 이루어졌고 이 두 실험은 무게가 다른 물체들도 중력 아래서는 실제로 같은 속도로 가속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속도 연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08년 갈릴레오는 총에서 총알이 발사될 때 또는 물체를 공중으로 던질 대 총알이나 물체가 따르는 궤적이 포물선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전까지는 단지 곡선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고 어느 누구도 그 곡선의 형태가 속도와 대포알의 무게와는 상관없이 항상 같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발사된 대포알이 대포와 같은 높이에 있는 목표물에 부딪칠 때, 대포알이 대포를 떠날 때와 목표물에 도달할 때의 속력이 같다는 것을 증명했다. 

1609년 망원경을 우연히 본 갈릴레오는 베네치아에 군사적 무역적 중요성을 띠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해 8월 그 장비를 파는 사람과 접촉하려고 했으나 실패해서 자신이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사용해 제대로 상이 맺히는 망원경을 만들어냈다. 

네델란드의 안경 제작자 얀 리퍼세이가 만든 3배율인 망원경보다 더 좋은 10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어 커다란 호응을 일으켰다. 

1609년 12월 20배율인 망원경을 만들어 케플러에게도 보냈다. 

1610년 초 자신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가장 밝은 네개의 위성을 발견했다. 

그는 코시모 대공을 기리기 위해 이름을 '메디치의 별들' 이라고 불렀지만 현재는 '목성의 갈릴레이 위성' 으로 알고 있다. 

또한 은하수가 수없이 많은 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달의 표면은 분화구가 있으며 수 킬로미터의 산맥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모든 발견들은 1610년 3월 <별들의 소식> 이라는 소책자에 실렸다. 

갈릴레오의 이 장비에 '망원경'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603년 네명의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세계최초의 과학학회로 알려진 린체이 아카데미 의 한 연회에서였다. 

그는 브루노의 운명을 보고 책을 펴내는 데 신중했는데 1613년 린체이 아카데미에서 출판한 소책자로 비판을 받게 되고 로마를 방문하자 종교재판에서 코페르니쿠스 사상을 신봉하거나 지지해서도 가르쳐서도 안된다는 공식적인 경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은 흑점에 대한 논쟁때문인데 당시 완벽했던 태양에 흑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신의 세계에 흠집을 내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세 걔의 혜성을 공상적인 설명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갈릴레오는 우주는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고 그 철자는 기학학적 도형들이다. 그것 없이는 인간은 단 한 글자도 이해할 길이 없다고 했다. 

1629년 11월에 <두개의 주요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 줄여서 대화> 집필을 마치고 1630년 5월에 원고를 넘겨주었지만 1632년에서야 피렌체에서 인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책으로 다시 종교재판에 불려가게 된다. 

마침내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를 중얼거렸다는 증거는 없다. 1634년 초에 자신의 집에 가택연금되었다. 

이 때 그는 대작 <새로운 두 과학에 대한 논의와 수학적 논증> 을 완성했다. 이것은 최초의 근대적 과학 교과서였다. 

1638년 빈센초 비비아니를 조수로 두어 갈릴레오의 서기 역할을 맡겼는데 오늘날 그의 글로 인해 갈릴레오에 대한 많은 전설들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갈릴레오가 최초의 과학자로 부를 만한 것은 추론을 관찰을 통해 실험하고 실험 결과를 도출해내려는 참된 과학적 방법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